2. 넓고 크고 높고 깊은 사랑

성경을 읽다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우리 각 사람에 대하여 말하기를,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1)

그렇지만 나는 죽은 적도 없고 살아난 적도 없다. 그저 세상에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숨쉬며 살고 있을 뿐인데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를,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1)

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그리고 무엇을 말하려 함인가! 생각을 가다듬어 곰곰이 성경을 상고하노라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창세기 2장 17절에 도달하게 된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고 하신 말씀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기어코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죄인이 되었고 또 전인류에게 죄를 유전시키는 죄인들의 조상이 되고 말았다. 그때 아담은 비록 겉모습으로는 살아서 숨쉬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다. 그렇듯이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다. 그런 실수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후손인 우리도 살아오는 동안에 실수와 죄투성이의 삶을 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베드로전서 1:18) 라는 말을 했으며,

또 바울도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라고 말하고, 이렇게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되었다고 했다. (로마서 5:18참조)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도 틀림없이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며, 아담과 같이 영적으로 죽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약성경 에베소서 2장 1-3절을 읽어 보면, 이 세상에 살면서 갇힌 우리의 정신 상태를 잘 지적해 주고 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죽은)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 2:1-3)

정말 그렇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였기에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와 같은 사실은 번연히 알면서 언제까지나 그 진노 가운데 가만히 숨죽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 각자의 마음을 성경이란 거울에 비춰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듯이 우리의 생각 하나 하나까지도 말이다. 먼저 구약성경 예레미야 17장 9절부터 10절을 읽어 보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살아온 우리의 과거를 뒤돌아보게 되고 또 지금까지 알고 지었든 모르고 지었든 죄를 짓게 하는 죄성이 우리 속에 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죄를 마음 속에 품기만 했었고 행동에는 옮긴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별로 죄가 없는 편이라고 자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경을 읽어보면 직접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았더라도 마음 속으로 남을 미워하거나 죽이고 싶어했다면, 그것 역시 살인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또 비록 간음은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음욕을 품은 마음 그 자체를 간음한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그럴진대 우리 가운데 누가 감히 스스로를 죄 없다 할 수 있겠는가! 마태복음 5장 21-22절, 27-30절을 읽어 보면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꿈틀거리는 죄의 성질이 있다는 것을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 5:21-22)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태 5:27-30)

에베소서 4장 18-19절에는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죄성에 대하여,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라고 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의 내적인 마음으로나 외적인 행동으로나 죄의 경중에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가 다 지니고 있는 죄의 성질은 마치 어떤 유전적인 질병처럼 내내 가지고 살아온 것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추악, 탐욕, 시기, 분쟁, 악독, 악의, 교만, 수군수군하는 버릇들을 가지고 살면서도 교양이나 교육, 혹은 종교적인 선행으로 잘 다듬어져 있기 때문에 남이 보기에는 퍽 선해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구약성경 이사야 64장 6절을 읽어 보면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참으로 그렇다.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 같다는 말씀대로 율법의 행위로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 그대로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라고 로마서 3장 20절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 종교적인 열심이나 율법을 모르고 사는 사람일지라도 양심의 가책을 자주 느끼며 사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이들은 로마서 2장 14-15절을 읽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런 일이 있는 것은 사람의 정신 속에 하나님께서 등불을 켜 두셨기 때문이다. 그 등불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잠언 20:27)

그런데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해 주시려고 먼저 성경말씀을 모든 인간에게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이 엄청난 죄를 안고 살다가 죽게 되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것을 불쌍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게 하셨던 것이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10,12,14)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0:17-18)

이 말씀들을 생각해 보면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으며, 또 값없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영원한 구원의 길이었음을 알 수 있으리라.

“이와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히브리서 9:28)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고까지 자세히 밝혀 놓으셨다. 곧 이 제사(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는 유대인들이 해마다 드리던 제사와 같지 않고 한꺼번에 드리는 영원한 제사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시기 오래 전,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시기 전에 선지자를 통해서,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시편 40:7-8)

라고 말씀하셨고 그로부터 오랜 후에,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브리서 9:26) 고 하셨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히브리서 10:12)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14)

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면 우리 각자 개개인은 태어나서부터 죽는 날까지 죄인이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인의 죄만 보시지 않고 죄인 자체를 영원한 사랑의 눈길로 다시 보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더럽고 미운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덮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에는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죄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용서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스가랴 3:9) 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인간은 죄인이 되고 싶어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하나도 없다. 다만 처음 조상이었던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으므로 그 순간에 죄인이 되어 버렸고, 또 우리는 각자 태어나자마자 유전하는 죄성을 물려받아 죄인이 된 것이다. 모든 인간이 이와 같이 다 죄인으로 태어났으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10)

라고 단언 하셨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인하지 않고 아담으로 인해 죄인이 되었기에,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들이 직접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써 온 세상의 죄를 하루에 다 제하신 것이다. 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좇아 자신을 십자가에 단번에 드리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온 세상 죄를 짊어지고 운명하실 때에 마지막 하신 말씀도

“다 이루었다” (요한 19:30)

라는 한마디였다. 세상 사람 모두의 죄를 단번에 용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던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 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저 나의 전부를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한결 가볍고 유쾌하게 될 것인데도 이 사실을 확실히 믿지 못하고 의심만 하고 있으면, 결국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이 엄청난 대가를 십자가 위에서 치르시게 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는 죄로써 그분을 더욱 더 서운하게 해 드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이사야 43:24)

고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셔서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3:25)

고 말씀하시고, 또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31:34)

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용서해 놓으시고 믿으라고 부르시는 것을 우리 각자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사야 1장 18절에 보면,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고 말씀하셨고 이사야 44장 22절에는 하나님께서 해 놓으신 일에 대하여,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간곡히 말씀하셨는데도 아직까지 자신의 죄짐을 스스로 지고 양심의 가책과 고민을 계속하는 이가 있으면, 지금 즉시 이사야 38장 17절을 읽어 보기 바란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인가. 만일 우리 각자의 죄짐이 이렇게 쉽게 용서되지 않았다면, 도대체 그 어떤 방법으로 용서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배운 찬송가의 어느 가사가 생각이 난다.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할 수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아도 못하네
(그렇지만)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6)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1:7)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24)

예수께서 내 죄를 담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를 대신해서 친히 죽으셨기 때문에, 리가 그의 죽으심으로 내가 함께 죽었고 그의 부활하심으로 내가 함께 살게 되었다는 확신이 있다면 진정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 로마서 6장 10-11절에,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라고 했으니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주신 하나님을 날마다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이 사실은 믿으려고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저절로 믿어진 것이다.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우리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타내시는 참된 믿음의 경험인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에베소서 2:4-5)

사실이다. 순전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요, 어떤 선행이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고 값을 치르지 않고 거저 얻은 구원이다. 다만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내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고 피흘려 죽으신 사랑을 고마워하며, 무조건 믿어버린 염치없는 이 단순함이 오히려 하나님 보시기에는 합당한 믿음인 것이다. 마치 어린 아기가 태어날 때 자기 자신의 힘은 하나도 안 들이고 태어나 어느 집 자녀가 되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도 이렇게 주어진 것이다. 야고보서 1장 18절을 읽어 보면,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고 하신 말씀이 있는데 이와 같이 내 영혼이 육체를 입고 한 번 태어난 것은 정신 속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해서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이와 같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인으로 태어나서 살다가, 이제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죄악에서 건짐을 받은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에베소서 2:8-9)

이렇듯 값없이 받은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선물은 값을 치르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어떤 공로나 값을 지불하고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로워질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은혜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결과가 되고 만다. (갈라디아서 2:21 참조)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의, 즉 인간이 애써 쌓은 공로를 이 절대적인 의, 즉 하나님의 의보다 더 앞세울 때,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

고 이사야 64장 6절에 말씀하셨다. 또 욥기 35장 8절에서도,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뿐이니라”

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는 잃어진 자신임을 발견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 또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3:20)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16)

일찍이 예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 5:20)

고 말씀하신 걸 보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그 어떤 종교적 열성도 그 당시 예수님 때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힘으로 천국에 갈 방법은 없다.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 14:6)

그렇다. 오직 이 한 길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 오직 이 한 길밖에 없다. 전에는 우리도 다 이 길을 모르고 방황하던 죄인들이었다. 마치 길 잃고 헤매는 양과 같이 말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처음에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면서,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한 10:16)

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길을 잃고 헤매던 죄인들, 더군다나 이방 죄인들인 우리들까지도 위하여 죽으셨던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한 10:11) 라는 말씀이나,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베드로전서 2:24)

라는 말씀 그대로이다. 이와 같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4:25)

이러한 내용의 사실들이 확실하게 믿어지고 의심이 없어졌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풀어주신 큰 사랑을 찬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우리를, 또 나를 정죄할 수 없다고 성경에 씌어 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로마서 8:34-35)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서 이 복음을 믿어지게 하셨고 또 값없이 의롭다고 해 주셨기에 이 사실이 개인에게 확실한 속죄 경험이 되었으며, 속죄를 얻은 개인은 마음에 화평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기 위하여 오래 전에 정하신 것이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43:21)

아멘.

Leave a Reply

Please log in using one of these methods to post your comment: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